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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에세이
2020-08-05

모든 삶은 기록할 가치가 있다



사회적기업 꿈틀이 2016년 시작한 <기억의책>은 유명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인생에 주목해 이를 한 권의 책으로 남기는 프로젝트다. 박범준 편집장은 처음 프로젝트를 시작한 경위와 지난 수년간 만난 이들을 담담히 돌아보며 한 편의 에세이를 보내왔다. 미국의 설교자 D.L. 무디는 “세상 사람의 100명 중에 1명이 성경을 읽고 99명이 그리스도인을 읽는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내 삶은 과연 어떤 종류의 책인가? 박범준의 에세이를 읽으며 잠시나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나는 늘 ‘우리 회사는 복이 참 많다’라고 이야기한다. 지난 4년여 동안 300명에 가까운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그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 수백 번의 만남은 수백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우리 귀로 들은 삶의 이야기들은 모두 한 편의 드라마이고 영화였다. 직업 때문에 가끔이라도 감동을 할 수 있다면 큰 행운일 텐데, 우리는 수백 개의 드라마와 영화를 만나면서 각기 다른 감동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만드는 책을 <기억의책>이라고 부른다. ‘자서전’ 또는 ‘생애사’ 혹은 ‘회고록’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우리가 굳이 <기억의책>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든 이유가 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한 4년 전만 해도 ‘자서전’이라고 하면 유명하거나 큰 성취가 있는 사람만 쓸 수 있는 책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최소한 지역에서 시의원, 구 의원 정도는 나가는 사람이나 쓸 수 있고, 그 책을 수천 권 찍어서 거창하게 출판기념회도 하는 책이나 ‘자서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고 싶은 책은 그런 책이 아니었다. 아주 유명한 사람이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은 소중하다. ‘내 살아온 이야기를 다 쓰면 책이 몇 권은 나올 거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아버지, 어머니들. 이분들은 적어도 그 가족과 후손들에게는 위인이고 유명인이 아닐까? ‘나 같은 늙은이 살아온 이야기에 누가 관심이나 있겠어?’라고 물으시지만, 적어도 자식과 손주들에겐 그 삶의 기록이 가족의 역사이고 자신의 뿌리일 거로 생각했다. 한 어르신이 ‘자서전’이라는 이름이 부담스럽고 남들 보기 부끄럽다며 책 만들기를 사양하신 후에 우리는 <기억의책>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내가 살아온 기억을 적은 책, 그리고 나를 기억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남기는 책이라는 뜻을 담았다.




5년 전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여쭤보고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전에도 드문드문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그렇게 긴 이야기를 아버지와 나눈 건 처음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한 가족의 가장이었고 사남매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자라면서 겪은 일들을 하나둘 듣다 보니 처음으로 아버지에게서 외로운 한 소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춘기 이후 소원했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거짓말처럼 부드러워졌다. 그때 처음 아버지의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드리자는 생각을 했다. 처음이라 고생을 하긴 했지만, 아버지의 <기억의책>이 세상에 나왔다.




당시 도움을 준 친구들과 사회적 기업 꿈틀을 만들었다. 우리 가족 말고도 이렇게 부모님의 삶을 기록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주로 가족들이 주문해서 책을 만들었지만,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나 제주도청, 한국교직원공제회의 의뢰로 책을 만들기도 했다. 꾸준히 한 길을 걷자 조금씩 누구나 자신의 삶을 담은 책을 만들 수 있다는 분위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작년부터는 직접 자기 손으로 자서전을 쓰고 싶은 분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3박 4일 자서전 워크숍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참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셨구나.’

<기억의책>을 만들기 위해 인터뷰를 하러 가면 드는 생각이다. 자서전 쓰기 강좌나 워크숍을 진행할 때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왜 아니겠는가? 나도 참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누군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고 공감과 이해를 표현해줄 때 큰 위로를 받는다. 말로 이야기를 하면 두서가 없어 지루할 수도 있고 실수로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지만, 책은 다르다. 그런 점에서 조금 더 안심하고 자신의 삶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읽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고칠 수 있는 게 글이니 말이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경청할 때도 위안을 얻지만 반대로 누군가의 삶을 귀담아들으면서 치유를 경험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공감의 눈물을 흘릴 때. 한 사람이 온 인생을 통해 얻은 교훈을 나에게 아낌없이 나눠줄 때. 누군가가 나를 믿고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줄 때. 그리고 내 이야기를 이렇게 들어줘서 참 고맙다는 진심을 느낄 수 있을 때. 내가 누군가에게 잠시나마 의미 있는 존재였구나 하고 스스로 대견스러움을 느낀다. 그 어느 순간만큼은 내가 이 세상에 홀로 떠 있는 섬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게 내가 <기억의책>을 만들며 느끼는 보람이다.

박범준 <기억의책> 꿈틀 편집장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5년 아버지의 <기억의책>을 써드리면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사회적 기업 꿈틀을 창업해 인터뷰 또는 교육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 자신의 자서전을 만들 수 있도록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