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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북 리뷰 주제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레고가 아이들이나 가지고 노는 장난감 정도로 여겨진다면 더더욱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레고는 누군가에게 열정을 쏟는 대상이고,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잠시 환기해주는 작은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창업주 가문의 히스토리가 우리를 예상치 못하는 길로 인도하시는 손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기도 한다. 김은령 편집장은 스페셜 에디션 <레고 북>(디자인하우스 펴냄)을 통해 이런 레고의 다양한 면면을 소개한다.
"레고라니, 아이들이나 갖고 노는 블록 장난감 아니야?"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지체 없이 지난 6월 출시와 함께 완판을 기록한 '람보르기니 시안 FKP 37'을 소개한다. 우아한 연초록색 차체, 별을 닮은 황금색 휠, 황소 로고가 박힌 핸들, 8단 변속기. 4,000여 개의 브릭으로 구성된 이 레고 시리즈는 전설적인 슈퍼카를 1/8 스케일로 완벽하게 재현했다. 이쯤 되면 갖고 노는 장난감보다는 자물쇠 달린 장식장 속에 고이 넣어놓고 감상해야 할 작품 아닐까?
목수였던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얀센Ole Kirk Christiansen은 1932년 덴마크의 작은 마을 빌룬트Billund에 공장을 열어 나무를 소재로 한 생필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2년 뒤 회사 이름을 레고LEGO로 짓고 본격적인 장난감 생산에 들어갔는데, 레고는 덴마크어로 '레그 고트(leg godt)', 즉 ‘잘 논다’는 뜻이었다. 세계 대전으로 인한 불황, 계속되는 도산 위기,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사업은 물론이고 인생도 쉽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2년에는 갑작스러운 화재로 인해 공장마저 전소됐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치지 않는 열정과 끊임없는 고심 끝에 1953년 여러 조각을 단단하게 결합하고 쉽게 해체할 수 있는 플라스틱 '브릭'을 개발했다. 이제 탄탄대로를 걸을 일만 남을 것 같았지만, 시련은 예고 없이 또 한번 닥쳐왔다. 1960년 공장에 다시 불이 나 나무 장난감 제작부서의 재고와 목재가 다 타버리고 만 것. 불이라면 진절머리가 날 만하다. 하지만 사업을 이어받은 창업자의 아들 고트프레드 커크 크리스티안센Godtfred Kirk Christiansen은 마냥 주저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나무 장난감 사업을 완전히 정리하고 대신 플라스틱 브릭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레고’의 시작이었다.
레고가 그저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에 머물렀다면, 60년 동안 전 세계 140여 개 나라에서 사랑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레고'의 이름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구매력 있고 수집욕 넘치며 손과 머리를 건전하게 사용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나이 든’ 고객 덕이었다. 자동차광들은 롤스로이스나 부가티 같은 레고의 슈퍼카 시리즈를 만들었고 영화 마니아는 레고 브릭으로 완벽하게 재현한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시리즈를 사들였다. 세계 곳곳에서는 레고를 사용해 예술작품을 만드는 ‘레고 아티스트’들이 활동 중이다. 덴마크 출신의 디자이너이자 건축가 비야케 잉겔스Bjarke Ingels*는 레고로 아예 집까지 만들었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의 창작의 원천 어딘가에는 레고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덴마크 건축계의 새로운 흐름을 이끄는 인물이다. <타임>지는 2016년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올려놓았다.
레고 설립 6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레고 북>에는 이 모든 이야기가 등장한다. 각기 다른 모양의 총천연색 브릭을 쌓아 놓고 의자에 앉으면,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레고의 탄생 비화부터 변화 과정, 익숙하기 그지없는 로고의 변천사, 역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컬렉션 시리즈까지. 아이돌 가수의 팬 북을 사들인 10대처럼,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이 설렜다.
"무한한 놀이의 가능성을 갖추고, 여아와 남아 모두를 위하며, 모든 연령층을 위하고, 1년 내내 즐길 수 있고, 건전하고 차분하게 즐길 수 있고, 싫증 나지 않게 장시간 즐길 수 있고, 상상력과 창의력을 높여주며, 신제품이 기존 제품의 놀이 효과를 극대화하고, 늘 화제 만발이고, 안전과 품질이 보장되어야 할 것."
1963년 처음 발표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져 온 레고 시스템의 원칙은 모든 좋은 취미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레고를 수집하세요’ 같은 일차원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블록과 블록 사이에 아로새긴 순수하고 뜨거웠던 열정을 떠올려 보자는 취지다. 나이가 들면 세상 많은 일이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익숙해진 만큼 젊은 시절의 열정은 사그라들기 쉽다. 우리가 취미를 갖는 것은 결국 잠깐이나마 그 열정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함이 아닐는지.
혹자는 물을지 모른다. ‘시간과 돈에 노력까지 쏟아야 하는데 그래서 어떤 이익이 돌아오냐고, 나이 들어 새로운 취미를 갖는 것이 무슨 의미냐고’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아무 쓸모 없는 것의 쓸모, 무효용의 효용. 재미의 가치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진짜 재미있는 일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 자전거 타기나 낚시나 레고 만들기나, 10살 때 재미있는 일은 60세, 70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즐겁다. 결국 행복한 인생이란 사소한 행복의 순간의 총합 같은 게 아닐까? ‘그런 순간들로 인생을 좀 더 많이 채우면 제법 성공한 삶 아닌가?’라고 레고를 조립하며 생각해보았다.
김은령 <럭셔리> 편집장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디자인하우스의 라이프스타일 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 기자 및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럭셔리> 편집장 겸 매거진 본부 본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밥보다 책> <Luxury Is> <비즈라이팅> 등이 있으며 <침묵의 봄> <설득의 심리학> <패스트푸드의 제국> <경영과 역사> <나이드는 것의 미덕> 등 30 여 권을 번역했다. 남편과 함께 라이프스타일 사이트 HER Report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