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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회사 스몰워크(SMALL WORK)의 대표이자 출판사 스몰워크(SMALL WALK)의 발행인이기도 한 전수영 작가는 예고 없이 찾아온 아버지와의 이별을 글로 남겼다. 아버지를 에덴낙원에 모신 그녀는 2018년 출간한 책 <나의 차례가 왔습니다>를 통해 아버지를 떠나보내던 순간*과 이후 다시 차오르는 생의 욕구에 대해 담담하고 솔직하게 써 내려갔다. 그로부터 약 2년이 흘렀다. 지나온 시간 동안 전수영 작가는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게 됐을까? 제주살이를 하는 전 작가를 만나 근황을 물었다.
* 전수영 작가는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계신 동안 휴대폰으로 기록한 글들도 이 책에 녹였다.
요즘은 어떤 일상은 보내고 있나요?
일과 육아로 이뤄져 있죠. 업무상 재택근무를 하므로 보통 일은 오전에 마무리하고 오후에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돌보고 산책을 합니다. 대형서점 웹사이트에 접속해 신간을 둘러보기도 하고요. 어릴 적 우리 집은 도배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책이 많았어요. 그런 성장 배경 때문인지, 저에게 책은 일종의 휴식이자 추억이 되었죠. 꽤 단순한 삶이죠?(웃음) 아, 이곳에서는 텃밭도 일구고 있어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면서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그때 수면과 휴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거든요. 텃밭을 돌보려면 따로 시간을 내야 하고 적잖은 노동력도 드는데, 그러면서 잡념을 지우는 편입니다.
전수영 작가의 제주 일상
원래 패션을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림이 좋아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사실 입시 미술에는 영 소질이 없었어요. 당시 오빠가 뉴욕에 있었기에 ‘오빠 찬스’로 미국을 가게 됐죠. 그런데 뉴욕은 패션의 도시잖아요? 그때 처음 패션에 매력을 느끼고 전공을 결정했죠. 보통 여유가 있어야 유학을 하러 간다고 생각하지만, 저희는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부모님은 집을 팔고 원룸으로 이사를 하였고 아버지는 연구소에서 간이침대를 놓고 주무셔야 했죠. 이런 사정을 잘 알기에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작가이지만, 사실 주업은 패션 사업을 하는 디자이너랍니다. 서울에 공장을 두고 있는데 사업을 시작한 지 15, 16년 차가 되다 보니 지금처럼 제주도에서 원격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됐죠.
전수영 작가가 만든 옷들
<나의 차례가 왔습니다>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자,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죠. 작가님에게 아버지는 어떤 의미였나요?
아버지는 스스로가 풍요롭게 채워져 있던 사람이셨어요. 외적인 것이 아닌, 내면이 가득 찬 분이었죠. 저에게 그런 아버지는 언제나 빛이 나는 존재였고 그렇기에 돌아가셨을 때 상실감도 컸답니다. 제 삶에서 진지하게 죽음을 마주하는 것도 그때가 처음이라 더욱더 낯설게 느껴졌어요. 한동안 아버지의 부재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한 가지를 깨닫게 됐어요. 아버지가 죽음을 통해 제 삶에 안내자가 되었다는 사실이죠. 동방박사가 하늘의 별을 보고, 귀인을 찾으러 갔듯이, 아버지가 하늘에서 제 인생의 길을 안내해주는 특별하고 독특한 길잡이가 되어 주셨죠. ‘아, 나는 더는 길을 잃을 일은 없겠구나’, ‘좋은 삶을 살겠구나’. 그런 믿음이 생겼어요. <나의 차례가 왔습니다>는 죽음으로 저에게 가르침을 준 아버지에 관한 책이에요.
책에서도 아버지의 죽음을 ‘새로운 국면’이라고 표현하셨죠. 삶과 죽음의 공존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날이 죽음으로 향하죠. 보통 사람들은 죽음에 관해 이야기 꺼내는 것을 어려워해요. 저 역시 그랬고요. 급성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레 쓰러진 아버지가 2주 만에 돌아가셨을 때도 죽음을 준비할 겨를이 없었어요. 죽음을 준비하기는커녕,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장기입원을 하실 경우, 일반실로 옮긴 후에, 가족들이 어떻게 간병 스케줄을 나눌까?’ 그런 이야기만 나눴어요.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는 것’만 생각했던 것이죠. 그만큼 죽음이란 주제는 닥치는 그 순간까지도 저희 곁에 없었답니다. 아마 인간이라서 그렇겠지요.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간접 경험한 이후로 생각이 점점 변해갔어요. 이제 저에게 죽음은 편안함에 접어드는 시기예요. 죽음은 삶의 태도에도 영향을 주죠. 예를 들어 육아하다 보면 종종 화가 날 때가 있어요. 그런데 ‘내가 당장 내일 죽는다면?’ ‘아이들이 내 곁에 없다면?”이라고 생각하면 태도가 완벽하게 달라지죠. 빠르게 평정심을 찾게 된다고 할까요? 세상을 달리 보기에 요긴한 툴이죠(미소).
<나의 차례가 왔습니다>, 안단테마더(현 '스몰워크') 펴냄
책을 출간한 이후 근래에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출신인 최인아 대표님이 운영하는 ‘최인아책방’에서 북 토크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다양한 연령대의 청중들을 만났는데, 흥미로웠던 것은 60대 남성들의 반응이었어요. 나이가 들면 자기 죽음에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자녀들이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도 생기는 것 같고요. 반성하는 태도로 죽음을 조망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아버지와의 작별을 아름답게 끝맺을 수 있었어요. 반면, 한 지인의 죽음은 상속을 둘러싼 싸움의 연속이더군요. 죽음의 종류는 다양한 것 같습니다. 가족이라도 남남처럼 보내는 경우도 있죠. 다양한 죽음의 모습을 통해 각자에게 현실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었고요.
photo by 김일다
책에서 에덴낙원을 ‘아빠 집’으로 부른다는 대목도 인상적이었어요.
아직도 네비게이션에 ‘에덴아빠집’으로 저장되어 있어요(웃음). 사실 이전에는 봉안당을 보면 별로 편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이들이 모인 공간이라는 생각이 강해 적응하기 어려웠죠. 에덴낙원은 달라요. 에덴낙원으로 향하는 길은 가족 여행 같기도 하고, 데이트하기 전의 설렘도 느껴지고. 진짜 ‘아빠 집’에 놀러 가는 기분이거든요. 아이들도 에덴낙원을 ‘할아버지 호텔’이라고 부른답니다(웃음). 그곳에서 숙박도, 하고 산책도 하고, ‘세상의모든아침’에서 식사도 하고. 그만큼 우리 가족에게는 편안한 공간입니다.
특히 어떤 점이 좋았나요?
자연이요. 방문했을 때가 8월이었는데, 푸르름이 절정에 달했어요. 아버지는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시고 의용공학과 바이오매디컬 교수로 퇴임하셨어요. 당신의 전공 외에 다른 곳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은행이나 동사무소 업무도 잘 모르셨죠. 그런 아버지가 유일하게 관심을 두던 것이 식물이었어요. 아버지는 정말 모르는 식물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에덴낙원을 둘러보고 ‘아버지가 참 좋아하시겠다.’ 싶었죠. 장례식에 참석하신 분들도 모두 에덴낙원의 자연에 넋이 나갈 정도였어요. 덕분에 아버지의 장례식은 슬픔이나 비통함과는 거리가 멀었죠. 봉안당이지만, 외롭거나 어둡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고인을 기리는 행위가 슬픔의 연장선이 아닌, 좋은 날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지금도 에덴낙원의 가든을 정말 좋아해요. 사계절 모두 방문했을 정도로.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종종 효창공원으로 산책하러 갔는데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에덴낙원의 가든과 주변 자연을 보면 자연스레 ‘아빠, 저 잘 살고 있어요’라는 마음이 들면서 편안해집니다.
화이트 & 실버 가든
문하우스
에덴힐 폰드
에덴낙원은 이곳에 모신 고인의 책을 기증받아 라이브러리를 채워 나가고 있죠. 혹시 어떤 책을 기증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을 기증했습니다. 책 속에는 “너의 오빠라도 좋고 너의 아버지라도 좋다. 아니 너를 위해 세상 무엇이라도 되고 싶다”라는 문장이 등장하는데요, 아버지는 여기에 밑줄을 긋고 나서 창경원에서 대학 예비고사를 막 마친 어머니에게 이 책을 선물하셨다고 해요.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어머니가 제자들에게 자비로 문고판을 대량 구매해서 나눠주었던 책이기도 하죠. 이 책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고 처음 선물한 책이고, 아버지가 떠나는 날 장례식장에 성경책과 나란히 국화꽃 아래 놓여있던 책이에요.
굉장히 뜻깊은 책이네요.
네, <독일인의 사랑>은 기독교적인 대화와 사랑에 대해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책 속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접하며 ‘삶이 끝나기 전에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을까?’, ‘더 함께할 수 없는데, 사랑이 지속 가능할까?’, ‘혼자 남았을 때는 어떻게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등 여러 질문을 떠올리게 되죠. 제 경우에는 부재한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듯한, 지금의 국면이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준 것 같아요. 사실 막스 뮐러와 아버지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막스 뮐러와 아버지 모두 77세에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학창 시절 아버지가 독어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독일어에 능통하셨어요. 독일어 성경책을 읽으실 정도였죠. 뮐러가 유일하게 남긴 소설책이 바로 이 <독일인의 사랑>인데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긴 책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 그 자체인 책입니다.
김일다 아티스트, 사진가
독일 Staatliche Hochschule fuer Gestaltung Karlsruhe (ZKM)에서 Visual Communication Design Diplom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2006년부터 다양한작품과 사진을 그리고 기업의 콘텐트플래너로써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에덴낙원의 영상 프로젝트와 사진을 그리고 인터뷰도 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