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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더불어 독일 고전주의의 2대 문호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는 “자연은 무한히 나누어진 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야생의 위로>(심심 펴냄)는 반평생 우울증과 싸운 에마 미첼Emma Mitchell이 자연을 거닐고 야생의 순간을 포착하며 마음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어쩌면 신은 녹음 속에 스며들어 우리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꽃이 아름답게 피었네..."
오랫만의 숲 속 산책길, 이런 말을 하고 나서는 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나여... 어떤 꽃이 어떻게 왜 아름다운지 설명하지 못하고 이렇게 대충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생각의 빈곤함과 무지함이란.
도시에서 태어나 아스팔트 길만 밟고 다녔고, 나무나 꽃이라고는 아파트에 피는 몇 가지 꽃과 나무가 전부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위로를 해보지만 늘 막연히 아쉽던 부분이었다. 정확한 이름과 습성을 안다면, 언제 어떻게 피고 지고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다면 나를 둘러싼 세상이 훨씬 더 풍요롭고 의미 있게 느껴질 텐데. 영국의 박물학자이자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인 에마 미첼의 <야생의 위로>는 그런 생각에서 골라든 책이었다.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어느 나라보다 더 낯설게 느껴지는 자연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서 말이다.
"6월쯤에는 한 해의 흐름이 조금만 느려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져서 잔디가 누렇게 바래고 한 해가 가을을 향해 반전되기 전에 생장의 계절을 길게 늘여 온갖 푸르른 풍요로움을 좀 더 편안히 흡수하고 싶다. 나는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어진다."
과학자의 눈과 시인의 마음을 갖춘 작가는 매달 조금씩 달라지는 계절과 생명의 변화를 아름답다 못해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그 이야기가 더 강렬하게 와 닿는 것은 저자가 25년 동안 우울증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우울증의 가장 큰 문제는 우울함 그 자체보다 자기혐오와 자기비판을 동반하고 이로 인해 무기력과 좌절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매일 극단적인 충동과 싸우며 자신을 조절하고 억제해야 하는 에마 미첼은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에 하나하나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만의 회복 의식을 이어간다.
그냥 걷기만 하는 것이라면, 치유와 위로가 되는 데 부족했을 것이다. 채집하고 발견한 것들을 죽 늘어놓고 감상하는 행동을 '놀링(knolling)'이라 부른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해 선택한 물품들을 진열하며 자그마한 임시 박물관을 조성한다. 그 과정은 위안을 주고 우울을 거둬갈 뿐 아니라 이 사물을 찾아낼 때 느꼈던 만족감을 준다." 동물과 식물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박물학을 연구하는 학자로 그는 산책을 다니다 발견한 것들, 이를 테면 들장미 열매, 버들강아지, 솔방울, 올빼미 깃털, 삿갓조개 껍질 등을 유심히 살피고 잘 챙겨와 가지런히 늘어 놓는다. 그 사소한 행위가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책장 속을 통해 나 역시 공감할 수 있었다.
숲길을 걸을 때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분비가 감소되고 맥박도 차분해지고, 피부와 망막이 햇빛의 자극을 받으면 신경세포 간 신호를 전달하는 화합물인 세로토닌의 분비가 활발해지며 편한 상태로 몸을 움직이면 혈류 내 엔드로핀이 분비된다는 것을 많은 과학자들과 의사들이 증명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이야기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숲이건 바다건 강가건 그 어디나 자연 속으로 들어가 걷고 움직이는 일을 하고 난 후의 기분 좋은 자극과 고단함을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경험하지 않았던가.
"어딘가로 갈 때 두 발 이외의 무언가를 이용한다면 속도가 너무 빨라질 것이며, 길가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천 가지의 미묘한 기쁨을 놓치게 되리라."
1920년대 작가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의 소설 속 한 구절을 인용하며 작가가 전한 이야기다. 그래서 엠마 미첼이 알려준 대로 천천히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 보려고 한다. 꽃과 나무, 새와 곤충의 이름을 공부하고 자연 속에서 미묘한 기쁨을 찾아보려 한다. 계절의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고 여유롭게 세상을 관찰하는 일.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누릴 수 있는 '호사'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테니까.
이미지 제공 도서출판 심심
김은령 <럭셔리> 편집장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디자인하우스의 라이프스타일 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 기자 및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럭셔리> 편집장 겸 매거진 본부 본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밥보다 책> <Luxury Is> <비즈라이팅> 등이 있으며 <침묵의 봄> <설득의 심리학> <패스트푸드의 제국> <경영과 역사> <나이드는 것의 미덕> 등 30 여 권을 번역했다. 남편과 함께 라이프스타일 사이트 HER Report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