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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컬처
2020-05-26

고요하고 역동적인 빌리 차일디시의 세계



전 세계가 여전히 코로나19로 인한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 때, 지난 4월 23일부터 안국동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 빌리 차일디시Billy Childish의 개인전 <늑대, 일몰 그리고 자신Wolves, Sunsets and the Self>은 우리를 잠시나마 팬데믹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그때로 돌아가게 만든다.





전시장 전경


‘다작하는 작가’, ‘많은 음반을 낸 음악가’, ‘수십 권의 소설과 시집을 펴낸 문학가’…. 영국 채텀 출신의 중견 아티스트 빌리 차일디시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는 솔직한 성격과 거침없는 언변으로도 악명(?) 높다. 터너상*을 비판하는 ‘안티터너상’ 운동을 펼친 스터키스트의 창시자인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연인이었던 트레이시 에민**이 터너상 후보에 오르고 유명 미술 컬렉터 찰스 사치가 그녀의 작품 ‘My Bed’를 사들이는 것을 보고 “나도 에민이 사용하던 침대를 가지고 있고,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2만 파운드에 팔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수위를 넘나드는 그의 언행은 ‘과감’을 넘어 ‘과격’하게 느껴질 정도다.


*영국 테이트 브리튼이 1984년 제정한 현대미술상

**1980년대 말 이후 나타난 젊은 영국 미술가 그룹 yBa(young British artists)의 작가 중 한 명


하지만 미술계와 주요 갤러리는 여전히 빌리 차일디시에 집중한다. 관객은 그의 작품 앞에서 쉬이 눈을 떼지 못한다. 이는 그가 생명과 창조를 찬미하고 창조자만이 구현할 수 있는 절대적인 에너지를 화폭에 구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예술가들도 작품에서만큼은 전지전능한 창조자가 된다. 그들은 회화, 조각, 설치 혹은 새롭게 등장한 여러 매체를 통해 ‘세상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것을 선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이 작품들 대부분이 새롭지만 매우 난해하다는 데에 있다. 반면 빌리 차일디시의 작품 세계는 현대미술의 이런 일반적인 우려에서 완벽히 벗어나 있다. 그가 주로 자연과 동물, 인간 등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피조물들을 화폭에 담기 때문이다.



Trees and Sky


물론 이것이 단순 모사에 그친다는 의미는 아니다. 빌리 차일디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피조물들을 재해석해 역동적으로 작품에 녹인다. 시들어가는 꽃과 석양의 아스라한 풍경 등을 그린 ‘Wolf, Tree and Road’(2019), ‘Trees and Sky’(2019), ‘Chrysanthemums in June’s Pot’(2017), ‘Midnight Sun / Frozen Lake’(2017)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원시적이고 선명한 색상, 배경과 대상의 명확한 선 경계, 뚜렷한 메시지 등은 그가 작품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Chrysanthemums in June’s Pot


비록 그의 언행은 거칠고 직설적이지만, 작품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더 없이 경건하다. 그는 33살까지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일절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작업할 때는 음악조차 멀리하는데 창작 활동을 하는 동안 그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사치는 재스민차 한잔이 전부라고 한다.



Wolf in birch Trees


늑대의 하얀 눈에서 극도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Wolf in birch Trees’(2019)는 빌리 차일디시의 작품이 지닌 매력을 잘 보여준다. 즉, 그는 대상이 품고 있는 에너지를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작품이 뿜어내는 힘이 워낙 강렬해 관객은 잠시도 한눈을 팔지 못한다. 재미있는 것은 빌리 차일디시의 이러한 힘이 무계획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그는 계획 없이 혹은 아주 작은 계획만 세운 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앉은 자리에서 작품 하나를 끝내 버리기도 한다.



Midnight Sun / Frozen Lake


또한 그는 그가 자신이 사는 곳이나 가족과 함께 떠난 여행지의 기록 사진을 참고해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정한 분위기를 인위적으로 연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회화는 나에게 자연스러운 일이고, 나의 본성을 가장 완벽하게 표출하는 방법”이라고 선언한 빌리 차일디시의 작품 철학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 이 외에도 그의 작품 속에서 하늘과 나무, 호수와 구름, 늑대와 숲, 시든 꽃과 기괴한 화병 등이 때론 서로 원근법을 무시한 채 드러나기 때문에 각자의 크기를 비교하며 감상하는 것도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난 방법 중 하나다.



Tree overlooking sea


이처럼 살아있는 것들을 자신만의 기법으로 화폭 위에 옮기며 일상의 순간을 노래하는 빌리 차일디시. 우리 주변의 삶과 풍경과 밀접한 그의 예술은 그래서, 매우 숙달된 듯 보는 이로 하여금 극도의 평온함을 선사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끝없이 요동치게 만든다. 이미지 제공 리만머핀 서울

김이신 <아트 나우> 편집장

<아트 나우> 편집장. 매일경제신문사 주간지 <시티라이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마담휘가로>를 거쳐 현재 <노블레스> 피쳐 디렉터와 <아트나우> 편집장을 맡고 있다. 국내 아트 컬렉터들에게 현대미술작가 및 글로벌 아트 이슈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8-2019 아티커버리 전문가 패널, 2018-2019 몽블랑 후원자상 노미네이터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