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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소망, 그리고 신앙과 사랑으로 지켜가는 가족의 이야기. 두 분 시부모님을 에덴낙원에 모신 이정숙 총장은, 죽음을 믿음으로 준비해온 한 예배자의 시선으로, 삶의 끝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신학자로 그 여정을 들려줍니다.
총장님께서 신학과 목회의 길, 사역자의 삶을 걷게 되신 특별한 계기나 기억에 남는 출발점이 있으셨을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환경이 바뀌고, 학교에서 진화론을 배우며 기독교 신앙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등부 시절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그중에서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답이 제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 질문 앞에서, 왜 내가 나 자신이나 가족 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되는지를 고민했고,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기에 그분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마땅하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전철 안에서도 바울서신을 손에 들고 읽을 정도로 성경을 가까이하게 되었고, 이화여자대학교에 진학해서는 다양한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을 통해 복음을 더 깊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3학년 때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 앞에 감동이 되어 선교사로 헌신했고, 이후 신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결국 교수님들의 추천으로 미국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께서 조용히 인도하신 길이었고, 저는 그저 그 걸음을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두 분의 시부모님을 차례로 하나님의 품에 보내 드리며, 에덴낙원에 모시게 되신 과정과 그 가운데 느끼신 마음을 나눠주세요.
시부모님께서는 70년대에 미국 LA로 이민을 가셔서 ‘LA영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셨고, 이후에는 버지니아에 정착하시며 ‘와싱톤중앙장로교회’를 섬기셨습니다. 그곳에서 평생을 마치실 줄 알았기에 교회 묘지도 준비해 두셨지만, 2015년 따님 부부가 귀국하면서 함께 한국으로 오셨고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시부모님 봉안단 앞에서
그때 저희 부부가 에덴낙원을 소개해 드렸고, 어르신들께서도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며 기쁘게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이후 두 분의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었고, 2023년 어머님께서 92세로 먼저 소천하시고, 지난 5월 5일에는 아버님도 95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지난 5월 시아버님 천국환송예배
어머님 이후 빠르게 쇠약해지신 아버님은 “나도 가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고, 저는 감사하는 마음이 하나님께 잘 보이는 길임을 조용히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씀 이후로 감사의 표현을 자주 하셨습니다. 시부모님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제게 큰 은혜였고, 특히 아버님은 저희 집에서 모실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말씀이 많지 않으셨지만 늘 저희를 편하게 해 주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제 두 분이 함께 더 이상 육체의 고통도 세상의 무게도 없이 지금 두 분이 함께 주님 안에 계시다는 믿음은 제 마음에 평안을 줍니다.
해외에 계신 가족들이 함께하지 못한 장례 가운데, 신앙 안에서의 연결을 어떻게 경험하셨는지요?
시부모님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셨는데, 제 남편 최두열목사가 장남이고, 전업주부 딸과 미국 아동 병원 원목인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이번 장례식에는 한국과 홍콩에 있는 가족만 참석할 수 있었고, 미국에 있는 가족들은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장면과 에덴의 모습을 수시로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 가족들과 나누었습니다.
함께 있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 순간 우리는 신앙 안에서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깊이 느꼈습니다. 이별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믿음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자녀들과 신앙을 어떻게 나누고 계신가요? 자녀 교육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점도 함께 나눠주세요.
아이들은 저희가 신학 공부를 할 때 미국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한국으로 와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신앙은 가정과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고등학생 이후에는 자신이 선택한 교회에 출석하도록 했고, 신앙에 대한 질문을 저희 부부와 자유롭게 나눌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가면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신앙생활과 교회 활동이 신경이 쓰였지만 본인들이 잘 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교육을 잘 시키는 대학을 간 첫 째와 달리, 상당히 아방가르드한 예술 대학을 간 둘째는 신앙의 도전이 무척 컸던 것으로 압니다. 또래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그림에만 빠져 생활하는 듯해서 걱정도 많았습니다.

홍콩에서 잠시 귀국한 딸 아이와 남편 최두열 목사와 함께
그런데 대학을 마치고 왔을 때 복음적 신앙이 나름 잘 성장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멀리서 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는데 그 시간이 자신만의 신앙을 세워가는 시간이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홍콩의 기독국제학교에서 교사로 있는 첫째나 순수 미술을 전공하고 작가의 삶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한 둘째나 늘 신앙을 지키는 일은 첫 번째 관심사입니다.지금도 자녀들과 믿음에 대한 대화를 자주 나누며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고령사회 속에서 ‘노년의 삶’과 ‘죽음을 준비하는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요즘도 여전히 여러 사역으로 분주하지만, 이런 정리의 과정도 웰다잉의 일부라고 느낍니다. 에덴낙원을 통해 죽음을 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시부모님의 마지막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구체적인 준비의 필요도 체감했습니다. 존 스토트 박사의 『Radical Disciple』에서 말하듯,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됨의 마지막 단계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더맵글로벌’이라는 선교단체를 통해 이주민 신학 교육을 돕고 있으며, 북클럽 사역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오래 사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게 사는 것, 살아 있는 날 동안 부활의 소망을 드러내며 ‘죽음까지도 제자답게’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에덴낙원에 대해 처음 느끼셨던 인상과 자주 찾게 되는 공간이 있으시다면요?
에덴낙원이 처음 계획될 때부터 이사장님을 통해 소식을 들으며 마음으로 함께했고, 기도로 동참했습니다. 이 공간이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부활의 신앙을 드러내는 장소로 세워졌다는 것이 여전히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부활교회와 정원을 특히 좋아하고, 도서관도 참 아끼는 공간입니다. 도서관에서 공부했던 기억이 참 좋고, 집이 가까웠다면 꽃을 가꾸고 봉사하고 싶을 만큼 애정이 갑니다. 지인들에게 이곳을 소개할 때마다 마치 제 집을 칭찬 받는 듯한 기쁨이 있습니다.
칼빈의 신학과 에덴낙원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칼뱅(칼빈, 1509-1564)은 파리에서 2시간 반쯤 북동쪽으로 달리면 나타나는 아름다운 도시 느와용에서 태어나 14세에 파리로 가서 파리와 오를레앙 브르쥐와 같은 도시의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학문적으로나 신앙인격으로나 개신교 종교개혁자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개신교종교개혁을 원했던 제네바시에서 목사로서 개혁자로서 신학자로서 활동했던 칼뱅은 늘 많은 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55세가 채 되지 못하고 죽었을 때 사인은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던 신장결석으로 인한 패혈성 쇼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는 내향적 성격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주어진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기뻐하였고 임종 2개월 전까지 공식업무를 감당했고, 죽기 전까지 예배에 참석하고자 애썼으며 꼼짝할 수 없이 눕게 된 때에도 문안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으며 그는 가장 소박한 모습으로 장례를 치르라고 부탁했고 그의 부탁을 따라 아무 표시가 없는 무덤에 묻히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칼뱅의 묘지 표지가 있는 곳을 방문할 수 있지만 후대의 추정에 근거한 것입니다. 칼뱅은 죽음을 ‘출정식’이라 부르며, 평생을 영원을 향한 여정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무덤에 아무런 표시를 남기지 말라고 할 만큼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했지요.

저는 에덴낙원을 방문할 때마다 그런 종말론적 신앙을 떠올리게 됩니다.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고 부활의 소망 안에서 이어지는 이 공간은, 칼뱅이 추구한 ‘겸손한 예배자의 자세’와 닮아 있습니다. 시아버님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오히려 그 가르침이 다시 선명해졌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대한 소망만이 우리의 죽음을, 또 오늘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정숙 총장
이정숙 박사는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M.Div.),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제5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프린스턴신학교 한국 동문회 회장, 아시아신학연맹(ATA) 부회장, 세계칼빈학회(ICCR) 세계중앙위원, 복음주의신학교육국제협의회(ICETE) 위원, 국제종교개혁박물관 자문위원으로 국내외 신학 및 교육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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