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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닮은 음악가, 가을이면 생각나는 브람스는 흐리고 바람 부는 날이 많은 독일 북부 함부르크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선율에 깊이가 있고 진한 색을 내듯 묵직하다. 첼로의 음색도 가을을 닮았다. 깊어가는 가을, 유재후 칼럼니스트로부터 웅장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에 대해 들어본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음악, 가을이면 생각나는 그 시절
올해 9월 하순 초가을 하늘색은 유독 파랗다. 아마도 올여름이 유난히 무더웠고 홍수와 태풍으로 힘겨웠기에 더욱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초저녁 불그레한 노을빛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 조그만 전원주택 정원을 가득 채운 가을꽃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마시는 와인 한 잔은 이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호사로움이다. 음악이 들려오면 더욱 좋다.
1978년 이맘때쯤엔 천도리에 있었다. 설악산 서북쪽에 있는 인제군 서화면 천도리는 최전방이다. 여름에 입대해 배치받은 곳이 하필 강원도 중에도 오지 산골이었다. 당시 천도리는 군인들을 위한 상점이나 술집, 다방이 몇 개 있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갓 입대한 졸병은 그나마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누군가 면회를 올 경우에만 허락되는 유일한 민간인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9월 말 어느 날 연병장 청소하는 중에 선임병이 불렀다. “면회 준비해”. 그러더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내 군복 다림질을 해주었다. 가족 중엔 면회 올 사람이 없었다.
그 시절 좋아하는 음악과 마음을 담아 건네던 추억의 카세트 테이프 출처 : pixabay
대학 입학 후 첫 미팅에서 만난 여인도 음악을 좋아했다. 각자 친구들을 불러 모아 주말이면 명동의 한 음악감상실에서 음악 해설 감상회를 열고 식사도 함께했다. 그 여인이 면회를 왔다. “가을이 되니 음악을 듣고 싶어 할 것 같아서... 특히 브람스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온 음악은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두 곡이었다. 누구의 연주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강원도 산골 허름한 여관방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었던 브람스는 잊을 수가 없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Johaness Brahms, 1833~1897)의 음악에서는 가을 냄새가 짙게 난다. 북구에 가까운 함부르크 태생으로 아버지보다 무려 17살 연상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평생 간직한 채, 독신으로 살면서 스승 슈만의 부인 클라라를 연모한 브람스의 음악 속에 쓸쓸함과 고독, 그리고 깊은 성찰과 함께 애잔한 그리움이 함께 배어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음악에는 우수가 깃든 서정성뿐 아니라 초가을의 청명한 하늘빛 같은 맑고 시원한 음색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브람스 특유의 목가적인 분위기가 함께 느껴지기도 한다.
Johannes Brahms, 1889 by Carl Brasch 출처 : Wikipedia
브람스의 작품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소위 ‘3B’로 불리는 독일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 바흐, 베토벤, 브람스 세 사람을 비교해 보아도 현저히 적은 수의 작품을 남겼다. 작곡에 신중을 기한 면도 있지만 아마도 두 선배 작곡가들이 브람스에게는 넘지 못할 커다란 벽으로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히 브람스가 가장 존경했던 베토벤은 그의 음악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바그너에게도 베토벤은 우상과 같은 존재였으나 그는 베토벤과는 완전히 다른 경향의 음악을 창조해가며 독일 낭만주의 음악을 개척해 갔다. 그렇지만 브람스는 낭만주의 시대를 살면서도 바그너류의 오페라에는 관심이 없었고, 교향시 같은 표제음악은 작곡할 생각조차 없었다. 베토벤이 남긴 고전주의 형식의 작품들에 자신의 작품을 하나씩 더해가며 진정한 베토벤의 후계자가 되고 싶었던 듯하다. 4개의 교향곡 (베토벤 9곡), 4개의 협주곡 (베토벤 7곡), 3개의 피아노 소나타 (베토벤 32곡), 3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베토벤 10곡), 2개의 첼로 소나타 (베토벤 5곡) 등 브람스의 작품 수는 그의 비교적 긴 생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베토벤에 필적할만한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그만큼 작곡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브람스, 첼로 소나타 1번, 2번
첼로는 바이올린과 더불어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현악기지만 바로크 시대까지만 해도 주로 저음을 풍부하게 해주는 반주 역할을 담당했던 악기였다. 비발디와 바흐 같은 바로크 시대 대 작곡가들이 첼로 독주곡을 남겼지만, 그 작품들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채 묻혀 있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빛을 보았다. 첼로 소나타 Sonata for Cello and Piano는 피아노를 수반한 첼로 독주곡이다. 고전주의 소나타 형식으로 작곡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인 첼로 소나타는 베토벤이 남긴 5곡이 선구적이며 가장 유명하다. 그에 필적할 만한 첼로 소나타는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후에야 브람스에 의해 탄생했다.
출처 : pixabay
첼로의 음색은 가을을 닮았다. 그리고 묵직하고 신중하지만, 왠지 쓸쓸하고 고독한 이미지의 브람스도 가을과 닮아있다. 1865년, 브람스는 어머니를 잃게 된다. 그는 스승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이 사망한 후 구상했던 ‘독일 레퀴엠’ 작곡을 어머니를 잃은 것을 계기로 다시 시작했으나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자 잠시 접어두고 3년 전 시작한 첼로 소나타 1번 작곡에 몰두했다.
첼로 소나타 1번은 브람스의 우수 어린 서정성이 가장 드러나는 시기의 작품으로 3개의 악장을 모두 단조로 구성했다. 어느 악장에서도 밝고 즐거운 분위기가 드러나지 않는다. 피아노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하지만 첼로의 구슬픈 음색에 눌려 우수의 깊이는 점점 더해간다. 조용히 쓸쓸하게 끝맺음하는 1악장에 이은 2악장은 미뉴에트 풍으로 다소 밝게 시작되나, 이내 애절하게 탄식하는 듯한 첼로의 호소력으로 인해 슬픔이 더욱 드러난다. 그렇지만 아름답다. 알레그로 빠르기의 3악장은 앞 악장들과 달리 힘차다. 밝은 분위기는 아니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악상인 카프리치오 풍으로 전개되는 마지막 악장은 슬픔을 잊게 하는 돌파구다.
가을이 시작된 에덴가든 풍경
브람스는 1886년부터 3년 동안 스위스 툰 Thun에서 여름을 보냈다. 친구들과 함께 즐겁고 여유롭게 보낸 이 시기에 작곡한 곡들은 밝고 생동감이 넘친다. 두 번째 첼로 소나타는 1번 소나타를 발표한 지 21년 후인 1886년, 그의 나이 53세에 스위스 툰 호숫가에서 작곡했다. 브람스 특유의 우수 어린 서정미는 그대로 느껴지나 한결 세련되어 있고 정열적이다. 1악장은 시작부터 격렬하다. 첼로의 어두운 음색에 피아노의 경쾌한 트레몰로(Tremolo, 빨리 떨리는 듯이 되풀이하는 연주법)가 더해져 웅장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피치카토(Pizzicato,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연주하는 방법)로 시작한 후 아다지오 빠르기로 전개되는 2악장의 첼로 멜로디는 지극히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저음의 구슬픈 첼로 음색이지만 쓸쓸함과 고독이 아닌 사랑의 감정만 그려진다. 2악장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3악장은 정열적이고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중간에 숨을 고르듯 우아한 악상이 전개되기도 하나 전반적으로 복잡하고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다. 그렇지만 재미있다. 4악장은 밝고 따뜻하다. 첼로의 가락은 온화하고 사랑스럽고, 피아노는 맑고 화려하다. 브람스의 첼로소나타 1번에서 늦가을의 쓸쓸함이 느껴진다면 첼로 소나타 2번은 9월 하순 초가을의 화창한 날씨와 닮은 듯하다.
♪ 음악 들어 보기
브람스 첼로 소나타 1번
Brahms, Cello Sonata No.1 Mischa Maisky (첼로) & Pavel Gililov (피아노)
브람스 첼로 소나타 2번
Brahms, Cello Sonata No.2 Norbert Anger (첼로) & Keiko Tamura (피아노)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 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