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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에 종사하지 않아도 누구나 이름을 알 만한 작가 중 하나인 쿠사마 아요이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전시가 있다. 9월 23일까지 중구 KG타워 아트스페이스 선에서 <‘쿠사마 야요이: 오리엔탈의 빛> 특별전으로의 초대.
‘쿠사마 야요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대중들이 바로 떠올리는 건 작은 검은색 도트로 가득 채워진 노란 호박 작품일 것이다. 작가 이름이나 정확한 작품 명을 모를지 언정 왠만한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아는 그 노란 호박 작품이 최근 큰 이슈가 된 일이 있다. 아트투어 코스로 유명한 일본 나오시마섬 베네세 하우스 해변 부두에 설치된 쿠사마 아요 이의 대형 노란 호박 조각이 태풍에 날아가 바다로 떨어진 것이다. 높이 2m 폭 25m 크기의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 들어진 이 조형물은 태풍 루팟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맥을 못 추고 바다로 날아가 파손이 되어 수리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 뉴스가 국내 인터넷 뉴스에까지 전해지며 많은 미술 애호가들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이토록 유명한 노란 호박 작품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할 <‘쿠사마 야요이: 오리엔탈의 빛>이다.
전시장 입구 전경
일본 대표 현대미술 작가로 손꼽히는 쿠사마 야요이는 1929년 나가도현에서 원예업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매 우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그녀는 특히 지나치게 엄격하고 고상한 어머니를 싫어했다. 그녀가 어머니를 그린 초상화 작품에서조차 수두에 걸린 것처럼 얼굴을 모두 덮었을 정도. 인터뷰에서도 “부모님은 큰 고통이었다”고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로 그녀가 어린시절부터 겪은 환영과 환청에는 부모의 영향이 컸다. 어린시절 그녀가 처음 경험 한 환영은 주방 식탁에서였다. 식탁보의 빨간색 꽃무늬가 벽과 바닥으로 시작해 온몸으로 퍼져나간 환영을 경험한 그녀는 여전히 지금껏 정신적 혼돈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여러 소재 중 ‘꽃’에 대한 강박관념을 표현한 작품들. 원예사였던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예술을 통해 자신의 강박장애를 승화하기 시작한 그녀는 1957년 뉴욕으로 건너가 퍼포먼스, 회화, 설치 등 다방면 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무한 반복되는 작고 독특한 흑백 망을 표현한 ‘무한 망(Infinity Net)’ 시리즈로 이름을 알리 면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었던 앤디 워홀, 클래스 올덴버그, 프랭크 스텔라 등 동시대의 뉴욕 예술가과 서로 영감을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1960년과 1970년대에 뉴욕에서 활동했지만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결국 1973년에 일본으로 돌아오게 됐는데, 지속적인 발작 등으로 인해, 스스로 세이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지금까지도 정신병원과 근처 스튜디오를 오가며 생활하는 쿠사마 야요이 작품의 특징은 정신적인 충격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강박 관념을 화면에 패턴화했다는 것. 그녀의 강박증은 공간이나 화면을 점(dot)이나 선(net) 같은 특정한 형태로 뒤덮는 패턴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점, 즉 땡땡이는 그녀의 시그니처가 되었다.
호박 안에 여성이 들어가 있는 작품 ‘Hello’는 인물에 작가 본인을 투영한 작품. 쿠사마 아요이의 자화상과 같다. 작가는 “예술이란 고통, 불안, 공포와 매일같이 싸우고 있는 내게, 그 강박신경증으로부터 나를 치유시키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고백한다.
작품 ‘Watermelon’의 위와 아래의 화면을 분할한 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선(net)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도트와 함께 쿠사마 야요이를 대표하는 패턴 중 하나다.
이번 전시는 국내 미술품 애호가들의 소장품을 가지고 꾸민 것으로 쿠사마 야요이를 대표하는 ‘호박’시리즈를 비롯 해 ‘화이트 인피니티’, ‘정물’ 시리즈 등 20여 점이 관객과 만났다. 대부분이 판화 작품인데, 다양한 판화 기법 중에 서도 다른 판식에 비해 잉크가 많이 묻어 색상이 강하고 선명한 실크스크린 기법의 작품이 많다. 쿠사마 야요이 작품을 대변하는 화려하면서도 강렬한 컬러, 비비드한 색감을 명쾌하게 표현해 낸 이번 판화 작품들은 사이즈는 작지만 무게감은 원화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쿠사마 야요이의 실크스크린 에디션 작품들은 대형 사이즈가 아니어도 이미 가격이 수천만원에서 수억을 웃돌기 때문에 이 전시에 출품된 작품이 판화라고 해도 결코 얕봐서는 안된다.
전시장 내부 전경. 생동감 있는 컬러가 빛을 발한다. 여러 관점에서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면 관객은 환영, 흐름, 방향 상실을 체험할 수 있다.
이는 작가 개인의 경험이기도 하다.
이번 소장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대부분 도트 작품들이다. ‘White Nets’(2006, Acrylic on canvas)를 비롯해 ‘Pumpkin’(1996, Screenprint) · ‘Panier de fruits I’(2000, Screenprint in colors with lam, on wove paper) · ‘Flower C’(2005, Screenprint) 등 다양한 작품들이 선보인다. 도쿄로 돌아와 슬럼프를 겪은 듯 보이던 시절이 있었지만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의 일본관 대표작가로 선정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했는데, 그 때 선보였던 작품들도 호박 조각상으로 가득찬 거울방 작품이었을 정도로 호박 작품은 작가의 이름과 거의 동일시 됨을 알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호박 작품을 한자리에서 원없이 볼 수 있다.
호박 작품 시리즈.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한 그녀의 작품은 끝없이 펼쳐지는 땡땡이를 통해 더욱 극대화된다. 그녀의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을 시작으로 파리 퐁피두 센터, 휘트니 미술관, 동경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되기도 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학대와 방관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환각과 환청을 경험하며 강박장애가 시작된 쿠사마 야요이. 환각에 시달릴 때마다 자기 소멸을 위해 수많은 점을 화폭에 찍었으며, 열 살에 시작한 물방울을 모티브의 그림으로 현재 세계적인 작가가 된 그녀는 지금도 물방울 패턴이 가득한 패브릭을 사용해 자신이 직접 옷을 지어 입는다고 한다. 자신의 인생을 ‘수백만개의 점 속에 길을 잃은 점’으로 정의하는 쿠사마 아요이의 이번 전시에는 작가 영상과 함께 작가에게 헌사하는 국내 신진 작가 김보미·노현영·이본·윤오현 등 4명의 오마주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관객의 입장에선 세계적인 작가와 신진 작가의 오마주 전시를 통해 시공간을 넘어 예술적 공감을 나누는 시간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사진 제공. 아트스페이스 선
김이신 <아트 나우> 편집장
<아트 나우> 편집장. 매일경제신문사 주간지 <시티라이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마담휘가로>를 거쳐 현재 <노블레스> 피쳐 디렉터와 <아트나우> 편집장을 맡고 있다. 국내 아트 컬렉터들에게 현대미술작가 및 글로벌 아트 이슈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8-2019 아티커버리 전문가 패널, 2018-2019 몽블랑 후원자상 노미네이터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