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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에세이
2020-09-01

나이 듦에 대한 사유



현재 한국 사회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부닥쳐 있다. 매스미디어에서는 연일 ‘젊음’을 외치는데, 실상 사회는 계속 늙어만 간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갖춰야 할 것은 나이 듦에 대한 성찰이 아닐까? 이상억 교수는 현실에 대한 냉정하고 침착한 판단과 성경적 지혜를 바탕으로 ‘나이 듦’에 대해 돌아보았다.



국제연합(UN)이 정한 고령의 기준은 65세이다. 2007년 통계청 기준,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 14%를 넘어섰기에 우리나라는 고령사회라고 할 수 있다. 2025년에는 인구대비 20% 이상의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한다. 그 주요 원인은 저출산이기에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젊은 층의 삶이 힘들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임신, 출산, 육아, 교육 등으로 자신을 희생하고 싶지 않다는 가치관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 세대를 기르고 양육하는데 필요한 생활기반이나 사회보장제도가 불안정하기도 하고, 경쟁 사회의 스트레스를 자녀 세대에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핵심 생산인구로 분류되는 젊은 층이 줄어들면 그만큼 고령 인구를 위한 사회복지체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 노인 자신도 심각한 심리적 위기감을 경험하게 된다. 젊은이들에게 괜한 짐이 되고 있다는 자괴감과 현실적으로 체감하는 경제적-신체적 한계, 노화에 따른 질병과 노년의 무력감으로 우리나라 노인 인구 자살률은 불명예스럽게도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얼핏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나라 경제를 되살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야 단단해진 사회보장 인프라로 젊은 층이 안심하고 아이들을 낳고 기를 수도 있고, 노인도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가 좋아지면 모든 문제가 해소되는 것일까? 정말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물론 삶을 논할 때 돈을 예외로 둘 수 없다. 고귀한 인간성조차 돈에 압도되는 세상이지 않나?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생의 경험, 즉 ‘나이 듦’은 깨닫게 한다.

카피라이터 정철은 “인생”이라는 주제를 이렇게 풀었다. “친구가 있으세요? 그럼 됐습니다.” 참 재미있는 풀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돈과 성공을 넣어 풀어본다면 마음이 좀 답답해진다. “인생, 돈 좀 버셨습니까? 그럼 됐습니다.” “인생, 성공하셨습니까? 그럼 됐습니다.” 인생을 말할 때, 아무래도 친구가 낫다고 여기는 이유는 ‘그럼 됐다’ 싶은 마음이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나이 듦은 가르쳐준다. 그래서 ‘나이 듦’은 ‘지혜 듦’이다. 특히 물질 만능이, 이기심이라는 왜곡된 개인주의가 어두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는 사회일수록 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어른들을 위한 동화, 트리나 폴러스Trina Paulus의 <꽃들에게 희망을>은 성공을 위해 친구도, 우정도, 신의도 짓밟은 채 애벌레 기둥을 아등바등 올라가는 한 애벌레를 비춘다. 꼭대기까지 올라간 애벌레가 발견한 것은 허무였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절망의 순간에 애벌레가 발견한 것은, 나비로 우화羽化한, 이전에 밟아 떨어뜨린 친구 애벌레였다. 새로운 깨달음에 애벌레는 욕심과 성공의 기둥을 내려왔다.

나이 듦이 지혜와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삶이라는 경험 덕이다. 그래서 ‘나이 듦’은 ‘살아봄’이다. 살아보면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지를 안다. 세상의 긴 역사에 비하면 점과 같은 세월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지만, 초월적이며 궁극적인 지혜를 갖게 한다. 에릭 에릭슨Erik H. Erikson은 이 지혜를 ‘자아통합’이라고 불렀다. 이것도 가하고 저것도 가하다는 ‘이순(耳順)’의 지혜를 깨닫기 때문이다. 물론 단지 나이가 들었다고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다. 에릭슨이 경고한 대로 ‘노년의 허무’라는 함정에 매몰되어 절망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혜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 고령 인구의 대부분은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경제성장을 경험했다. 격동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자연스럽게 ‘번영’이라는 단어가 삶의 화두요, 목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 신학도 번영 신학이 주를 이뤄 더 큰 예배당을 건축하고 더 많은 사람을 모으고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을 축복이라 여겼다. 이것이 틀렸다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이 듦에 대한 사유의 방향은 자아통합을 지향한다. 현실과 초월, 물질과 궁극, 현실과 가치 등, 극과 극의 대치가 아닌, 모순의 통합을 이룬다. 그래서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 또 무엇이 진짜 행복인지를 깨닫게 한다. 그래서 살아보니 돈보다는 사람이, 성공보다는 인간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물론 나이 듦의 지혜를 달가워할 젊은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경험하지 못했는데 깨달으라 닦달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이 듦의 권면을 듣기 싫은 잔소리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잔’소리를 ‘큰’소리로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인 공광규는 자신의 시, “속 빈 것들”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 줄기에서 슬픈 숨소리가 흘러나와/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었다는 갈대도 그렇고/ 시골 뒤편에 총총히 서 있는/ 대나무도 그렇고/ 가수 김태곤이 힐링 프로그램에 들고나와 켜는/ 해금과 대금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회의 마치고 나오다가/ 정동 길거리에서 산 오카리나도 그렇고/ 모두 속이 비어 있다/ 나도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 속 빈 것들과 놀아야겠다.”

경쟁 사회에서 천천히 걷고 찬찬히 세상을 대하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말한다. “너는 속도 없느냐”고, “속이 빈 게 아니냐”고. 하지만 속이 비면 빌수록 울림은 깊어지는 법이다. 나이 듦으로 깨닫게 된 지혜를 ‘큰’소리로 나누고자 한다면, 나이 듦의 세월을 견딘 만큼 인내가 필요하다. 지금 당장 깨닫게 하려고, “다 소용없더라,” “그거 별거 아니야,” 지혜를 너무 빨리 말하면 잔소리가 되고 넋두리가 된다. 이를 ‘큰’소리로 전하려면 ‘그들도 경험해야 알 테니’라며 넉넉하고 넓은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선교신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가 말했던 ‘일치성integrity’을 실천하는 것이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깨달은 지혜를 삶으로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 시바타 도요는 아흔이 넘어 시를 쓰기 시작했고, 백 세에 시집, <약해지지 마>를 출판했다. 같은 제목의 시는 이렇게 말한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시가 ‘큰’소리로 들려오는 이유는 나이 듦의 지혜를 자신의 삶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제 앞선 질문으로 돌아가자. 어떻게 허무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지혜에 이를 수 있을까? 나이 듦이 가르쳐준 오래 참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야 하는 거라고, 때가 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라고, 경험으로 알게 된 지혜를 다시 한번 연습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림의 지루한 시간을 오히려 누려보는 것이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에게,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게 먼 나라 이야기를 들어 보며, ‘우와! 네가 여기 있었구나.’ 이름 모를 들풀을 바라보며 좋은 친구를 발견한 듯 감동하는 것이다. ‘이야! 세상이 애틋하고 찬란하구나.’ 비록 눈물과 한숨으로 가득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추억할 줄 아는 따뜻함으로 소풍 온 듯 세상을 관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혜를 사는 것이다. 삶으로 묵묵히 보여주는 것이다. 시간과 진정성은 비례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 진정성은 존재가 흔적 없이 사라져도 누군가의 가슴에 남는 법이니까.


사진: 김일다

어른이 필요하다. 긴 세월 묵묵히 살아낸 어른이 필요하다. 세상 풍파 많은 시련을 온몸으로 경험하고도 고고한 모습 간직한 채 우뚝한 어른이 필요하다. 특히 오늘과 같은 혼돈의 시대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번영의 역풍에 휘말린 듯 인간성이 추락하고, 코로나 19 감염증이라는 대혼란을 경험하는 지금, 나이 듦의 지혜가 필요하다.

떠날 시각이 가까움을 알았던 바울은 자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그의 말이 교만한 자랑으로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큰’소리로,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가 그렇게 나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음을 살았기 때문이다. 신앙인의 품위를 지키며 누군가를 살리는 품격을 나이 듦의 전 과정을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나이 듦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아닐까.

사진: 김일다

이상억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목회상담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경건교육처장, 경건훈련원장, 학생생활상담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야기>의 저자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사람의 아름다움을 마음 따뜻하게 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