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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0

슬프고도 아름다운 전쟁의 유산, <주명덕 섞여진 이름들>전



한미사진미술관에서 8월 8일까지 열리는 사진작가 주명덕의 <섞여진 이름들>전은 날 선 시대 인식에 근거한 기록사진의 표본을 보여준다. 이는 작가가 역사의 상흔을 보듬고 치유하는 나름의 방식이다.


섞여진 이름들, 1963~1965


지난 6월 25일은 한국 전쟁 70주년이었다. 코로나 19의 여파로 대다수 미술관이 문을 닫은 와중에 전쟁에 관한 굵직한 두 개의 전시가 열렸는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낯선 전쟁>과 한미사진미술관의 소장품전 <주명덕 섞여진 이름들>(이하 <섞여진 이름들>전)이 그것이다. 이중 주명덕 작가의 회고전 <섞여진 이름들>은 1960년대 홀트아동복지회 고아원 아이들의 모습과 서울의 풍경을 담은 사진으로 눈길을 끌었다. 전쟁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 점, 기록과 사실에 충실한 작가 특유의 초기 작업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번쯤 들여다 볼만하다.


한미사진미술관의 12번째 소장품전이기도 한 이번 전시의 뿌리는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서울은 한국전쟁의 잔재와 신문물의 유입이 뒤엉킨 과도기를 겪고 있었다. 그 안에서 벌어지던 여러 안타까운 사회적 문제를 보며 작가는 혼혈 고아를 사진 작업의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혼혈’, ‘고아’, ‘가족’ 등 인간의 본질에 가까운 단어들이야말로 사회와 국가, 민족이 함께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라고 여긴 까닭이다. 일반적으로 대중이 예술에 기대하는 것은 아름답고 긍정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사회 곳곳에 파고든 어둡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포착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자 사명이라 여겼다. 그런 책임 의식의 결과물이 1966년 열린 <포토에세이 홀트씨 고아원>전이다.


섞여진 이름들, 1963~1965

1966년 서울 중앙공보관화랑에서 선보인 이 전시는 한국 기록사진 역사 최초로 주제의식을 갖고 ‘연작’ 형태로 진행된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였다. 홀트씨 고아원 아이들의 초상 95점은 관람객의 심금을 울렸고, 여러 매체가 비중 있게 이를 기사화하면서 전쟁 후 남겨진 ‘혼혈 고아’의 존재를 사람들의 인식 속에 각인시켰다. 작가는 1969년, 전시를 정리한 사진집 <섞여진 이름들>을 출간했고, 한미사진미술관은 이 사진집에 수록된 51점 전작을 소장했다.

지난 6월 13일부터 열린 <섞여진 이름들>전에는 한미사진미술관의 소장 작품 51점을 비롯해 미군 주둔 지역에 잔재한 혼혈고아 문제를 다룬 <용주골>과 <운천> 등 10점의 작품, 아련한 서울의 풍경을 담은 <서울> 30점 여기에 그동안의 아카이브 자료와 주명덕 작가의 출판기념회 자료 등이 소개됐다.


운전

혼혈 고아들과 미군 주둔 지역의 동네 풍경 등 약 60점의 흑백 사진이 걸린 제 1전시장에는 아이들의 슬픈 시선이 가득하다. 조도가 낮은 전시장을 빙 둘러 채운 혼혈 고아들은 비극적 전쟁, 하룻밤에 맺어진 생명, 가족이란 생소한 이름, 버려진 자의 고통을 차마 가늠할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관람객을 응시한다.


섞여진 이름들, 1963~1965

1963년부터 3년간 찍은 이 사진들은 출생부터 기구한 혼혈아들의 생활을 그대로 보여준다. 피부색부터 외모가 다른 그들은 대부분 사생아였고 어머니에게조차 버려진 아이들이 많았다. 사회적으로도 외면당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배척되었고, 교육적으로 혜택 받지 못한 이 아이들은 대부분 해외로 입양되었는데, 그 이후의 삶이 과연 행복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섞여진 이름들, 1963~1965

1관에 진열된 고아들의 사진 중 엄마가 등장한 사진은 단 한 장(위 사진). 돌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오랜만에 만나는 엄마가 어색한지 미간에 잔뜩 인상을 쓰고 울고 있는 사진이다. 젊디젊은 여인과 아마도 흑인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을 돌쟁이 아가. 안타까운 탄식은 한 아이의 기도 사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섞여진 이름들, 1963~1965

주명덕 작가의 아내이자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던 고 홍휘자 씨는 기도 사진 아래 이렇게 적었다.

“기도. 조용하고 구김살 없는 마음으로부터의 끊임없는 기구. 하나님께의 간구와 의지. 한 귀퉁이에서, 어느 모서리에서인가 새어 들어오는 가느다랗고 맑은 한 줄기 빛. 소중스레 가슴 깊이 쌓아둘 뿐. ‘나는 누구입니까’”

혼혈 고아들에겐 혈육도, 정상적인 생활도 없었다. 그 아이들에게는 감정조차 사치였을 것이다. 검은 살갗과 거역지 못할 숙명만이 있었을 고아들의 사진을 보면, 누구라도 ‘한국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된다. 홍휘자 씨의 에세이에서처럼 ‘한국적인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을지 모른다.


섞여진 이름들, 1963~1965
섞여진 이름들, 1963~1965


제2전시장에는 주명덕 작가의 미학적 감성으로 포착한 1960년대 도시 풍경 <서울>의 사진들이 우리를 그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촬영한 이 작업들은 당시 서울의 일상적 풍경과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른하게 담은 것이 특징이다. 마치 천천히 관조하듯 담은 흑백 사진들은 1관의 혼혈 고아들과 더욱 대비되어 극도의 담백함과 편안함을 선물한다.

서울 연작 중 덕수궁, 1964

성당 앞을 발소리도 나지 않게 걸어가는 수녀들의 모습, 흰 눈으로 뒤덮인 광화문의 풍경, 꾸벅꾸벅 조는 아이의 편안한 낮잠, 비 오는 날의 골목길 등은 작가가 걸었을 덕수궁 산책로를 짐작게 하고 그가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타고 다녔을, 이제는 사라진 전차를 추억하게 한다.


서울 연작 중 명동성당, 1962

서울 연작 중 뚝섬, 1965

서울 연작 중 광화문, 1965

<포토에세이 홀트씨 고아원> 전시 개최 55주년을 기념해 구성한 아카이브 자료는 제3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작가의 전시와 출판기념회에 다녀간 관람객의 낡은 방명록, 전시를 소개하는 기사와 출판기념회 당시 사진예술에 실린 작가의 소감 에세이, 55년이 지난 지금 머리가 하얗게 센 주명덕 작가의 인터뷰 영상까지 바라보다 보면 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사실’과 ‘기록’의 미덕, 그리고 사진이라는 매체가 지닌 독특한 치유의 힘까지 경험할 수 있다.





이미지 제공 한미사진미술관




김이신 <아트 나우> 편집장

<아트 나우>편집장. 매일경제신문사 주간지 <시티라이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마담휘가로>를 거쳐 현재 <노블레스> 피쳐 디렉터와 <아트나우> 편집장을 맡고 있다. 국내 아트 컬렉터들에게 현대미술작가 및 글로벌 아트 이슈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8-2019 아티커버리 전문가 패널, 2018-2019 몽블랑 후원자상 노미네이터를 역임했다.